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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 이야기 한 조각

87년 이야기




87년 즈음이었을게다.
학교 끝나면 피아노학원과 주산학원으로 가야 했던 당시의 나는 
그보다는 노는게 더 좋은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어른들 보는 TV 뉴스에선 
대학생 형들이 폭력적으로 데모하는 모습만 계속 보여주고 있었고
시험공부하느라 봐야했던 국민학생 전과 표지에는
단군 할아버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위인 사진으로 박혀 있었다.

6월의 어느날 즈음이었을까?
서울에서 그렇게 폭력적으로 데모하는 무서운 대학생 형들이
북한과 맞닿은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우리동네로 처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필이면 내가 다니던 학원이 바로 문산역 근처에 있었고
혹시나 학원 유리창으로 무서운 화염병 같은게 날라오는건 아닌가 하고
학원 가기 무섭다고 꽤 한참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갑자기 수업을 중단하고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이상한 말들이 적혀있는 어깨띠를 두른 선생님들이
고함을 지르며 각 반의 아이들 줄을 맞춰 서게 만들었고
조례 단상 위에 올라선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은
무슨 궐기대회를 한다며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내용인즉 나라를 망가트리는 폭력적인 대학생 데모를 즉시 중단할 것을
몰지각한 대학생 형들은 얼른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할 것을
촉구하는 궐기대회였다.

앞에서 마이크로 뭐라고 떠들면
도대체 무얼 하는건지 알지도 못하는 어린 친구들은
앵무새처럼 마지막 말을 따라 외쳐야만 했다.
안그러면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서 있는 선생님께 혼날것 같았으니까...

그날 왜 대학생 형들이 기를 쓰고 판문점에 가겠노라고
문산역으로 처들어오려 했는지
왜 학교에선 어린 우리들을 몰아세워서 궐기대회를 열었는지
한참을 아주 한참을 지나고 어른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그날 우리가 궐기대회에서 외친 말들이 무슨 말이었는지를...

너무 어린 나이였다고, 몰라서 동원되었던거라고 자위해봐도
늘 마음 한 구석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부끄러운 장면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고 이제 조금은 사리분별하는 법도 배웠는데
안녕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외침을 엿보는 
나나 세상이나 여전히 
87년, 초등학교 5학년 딱 그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질 못한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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