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서른의 나이를 눈 앞에 두었던 스물 아홉의 마지막날
I-5 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시애틀의 45th st 다리 위에 막연히 서서
오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지독한 후외와 아쉬움에 떨었더랬다.
이전까지 단 한번도 떠올려보지 못했던 후회와 아쉬움이었기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끝끝내 억울하고 아숴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했던 지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고
목숨과도, 젊음 과도 바꿀 수 있다 믿었던 이십대 시절의 신앙과 이상을
끝끝내 성취하지 못했다는 실패감도 아니었다.
나를 가장 후회하게 만들었던건
90년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락카페를
단 한번도 출입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
예쁘진 않아도 마음에 드는 이성과 손잡고 데이트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한참 찬란하게 피었어여할 이십대의 날들을
그저 늘 고뇌의 포즈로 똥폼만 잡고 살았다는 사실이
지독한 아쉬움으로 밀려들었다.
막 스무살이 되던 무렵 손에 늘 <전태일 평전>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 책 안에서 발견했던 하나의 아포리즘
"너의 죽을 자리를 찾아라"라는 말을 이십대의 표어처럼 삼았다.
그리고 정말 죽을 자리를 찾고 싶었다.
스무살의 그 해 처음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신앙에 목숨걸고 싶었고
내가 옳다고 믿는 사상에 목숨걸고 싶었고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그라드는 사랑에 목숨걸고 싶었다.
그런데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나를 찾아온 아쉬움이란 감정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른 또래의 이십대들 처럼 젊음을 즐겨보지 못했다는 것
죽을 자리를 찾겠다는 똥 폼 만 잡다가 결국 죽을자리도 못 찾고
사는 자리에서마저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후회였다.
그래서 정말 즐거운 삼십대의 날들을 맞이하고 싶었다.
죽을 자리를 찾던 이십대가 아니라 사는 자리를 즐기는 삼십대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삼십대의 날들을 수년 째 살아오면서
여전히 똥 폼 잡는 내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오늘 하루
나는 정말 재미있는 삼십대의 하루를 살아냈을까?
이십대의 마지막 즈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쿠사나기 츠요시 주연의
<내가 사는 길>을 다시 훑어 보다가 문득
삼십대의 마지막 즈음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
다시금 돌아보며 물어 보았다.
나는 정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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