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일곱살, 처음 신호등을 경험했다.
신호등 하나 없던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첫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봤던 파란불 빨간불이 익숙치 않아서
옆사람 눈치를 한참 보다가 따라서 움직여야 했다.
열 여덟살, 처음 지하철을 탔다.
수도권에 살면서도 혼자 서울 한번 가본적 없던 시절에
친구따라 처음 교보문고에 들러 프랑스 시집 한 권 사던 날
화살표시가 없는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왜 내 차표가 들어가지 않는지 한참을 해맸더랬다.
열 아홉살, 처음으로 혼자 식당 밥을 사먹었다.
대입 원서를 구입하고, 접수하고, 면접보고..
혼자서 서울 여기저기를 헤매다니며
이 학교 저 학교 찾아 다니느라 밥도 혼자 먹어야했다.
식당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들어가도 될까?' '혼자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한참을 망설이며 주문했던 만두국을 허겁지겁 마셔버리고 서둘러 나왔다.
스무살, 처음으로 자퇴를 했다.
동기들도 선배들도 선생님들과 가족들까지도 모두 말리던 상황에서
혼자 기도하고 혼자 결심했다.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기숙사 짐을 빼서
큰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끌며 혼자 농협대 정문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내 이십대의 삶을 '뛰쳐나감'과 '모험'으로 시작한다는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스물 두살, 처음으로 마음을 건네봤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했던 첫날부터 마음이 가던 한 사람에게
일년만에 처음으로 고백을 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절을 받았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 스물두살 그 해에 매여 살아야 했다.
스물 일곱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난생 처음 비행기에 올라타서 6시간을 날아서
말도 통하지 않던 나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내려섰다.
굵은 함박눈이 공항 위로 쏟아지던 그 겨울날
영화에서나 보던 러시아식의 경찰제복을 입은 사람들에 겁먹고는
공항 검색대 앞에서 짐을 도둑맞았다.
서른 두살, 처음 전도사라 불렸다.
신대원에 처음 입학했던 어느날,
아직 사역도 시작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같은 신대원 입학동기였던 한 동생이 저만치 뒤에서 나를 불렀다.
"심재훈 전도사님.."
그 낯선 호칭이 간지럽고 한편 무거워서
한참을 곱씹고 또 곱씹었더랬다.
서른 세살,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유세했다.
다음 년도 대학원 총학을 섬길 사람들이 누구일까
좋은 사람을 세워달라고 기도만했지 설마 내가 그 자리에 설 줄은 몰랐다.
함께 출마하자고 찾아온 런닝메이트의 끈질긴 설득에
끝까지 거부하고 또 거부하다가
그럼 정후보는 도저히 자신없으니 부후보로만 나가겠다 하고는 출마했다.
동기 선후배들 앞에서 처음 출마선언을 했던 날
남들이 비웃으면 어쩌나 싶어서 한참을 떨었더랬다.
서른 여섯살, 처음으로 장거리 운전을 했다.
면허 딴지 근 십년을 넘었으면서
늘 파주 시골에서나 운전했지 장거리 한 번 뛰어본적 없던 내가
그것도 낯선 미국 땅에서
네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랜드 래피즈와 시카고 사이길을 왕복으로 운전했다.
야밤에 안개가 자욱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고속도로를
시속 90마일로 달리면서 문득 '여기서 죽으면 나 한국에 묻어줄까?' 궁금했다.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이루어내곤 한다.
남들 다 쉽게 경험하는 것들을 늦게까지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남들 쉽게 경험해보지 못할 일들을 숱하게 경험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늘 첫경험의 기억만큼 강렬한 것도 드물다 싶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했던 기억,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났던 기억,
그리고 처음으로 마음에 품었던 기억들 덕에
만남도, 경험도, 마음까지도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게 아닐까?
오늘을 사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것들에 익숙하고 또 많은 것들에 새로워한다.
그 많은 만남과 경험들을 마음에 담을 수 있어서
여전히 많은 새로운 것들에 설레어할 수 있어서
또 하루 살아내고 또 하루 만나가는 것일게다.
내일 또 내게 주어질 익숙한 것들과 새로운 모든 것들에
설레임과 기대를 듬뿍담고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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