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들 2014. 8. 25. 18:09





독서논술 시간에 '키다리 아저씨'를 다루고 나니
불연듯 오래전 보았던 만화가 생각나서
인터넷을 뒤져 일본판 '키다리 아저씨' 40편 전편을 다운 받았다.
옛날 보았던 바로 그 애니...

남자치고는 유독 그 이야기를 좋아해서
한글 번역본으로만도 수십번 반복해 읽었고
영문본으로도 서너번 이상은 읽고 또 읽었던 소설이다.

키다리 아저씨와 얽힌 이야기나 저비스 도련님과의 연애담 같은것 보다는
사실 이 이야기가 나를 흥분시킨건
고아원을 나와 처음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서 적응해 가는 이야기였다.

처음 나온 세상에 대한 흥분과 기대
그리고 학교에서 맞이하는 친구들과 공부
뭐 그런 것들이 주는 설레임이 유독 좋았던 탓이다.

그 덕에 학교 다니던 시절 매 학기 첫 시작할 때마다
유독 이 책 생각이 많이 나서 꼭 한 번 이상 씩을 되읽곤 했더랬다.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설레인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설레이는건 출발할 때이다.
도리어 여행 중에는 귀찮고 시쿤둥할 때가 더 많았지만
처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육지를 떠나 이륙할 때의 그 느낌만큼
여행이 가져다 주는 설레임과 흥분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오래전 김동길 교수가 한 때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를 인터뷰했던걸 들은 적이 있다.
진행자의 질문은 왜 평생을 독신을 유지하며 사시느냐였는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레임이 좋았을 뿐이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주고 사랑하고 함께 하는 모든 과정 중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날 때의 그 설레임이 가장 강렬한 탓인걸까?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강렬하다.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엇이든 맨 처음 주었던 그 마음이 가장 커다랗다.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줄어드는 마음은
점점 식어가면서 이내 일상 속에서 무료해져버린다.

어쩌면 내 믿음도 그렇다.
처음 그 분을 만났던 그 감격과 설레임을 두고
소위 말하는 신앙의 연륜이 한 해 두 해 쌓여갈 수록
교회 안의 권위주의 문화에 더 익숙해져가는 나를 본다.
신학을 배우고 목사가 되면서 더욱
처음의 그 감격과 멀어지는 나를 본다.

일상적인, 그래서 무료하고 권태로운 그 대상을
늘 처음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만은 없는 것일까?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브레히트가 이야기했던 '낯설게하기'를 차용한건데
그 대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다.

늘 마주하는 가족같은 사람마저도
새삼스레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보았을 때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그를 마주할지도 모르니까...
전에 몰랐던 그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그마저 안되더라도
그저 그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누군가를 혹은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저 한 순간 모름에서 앎으로 넘어가는 방점같은건 아닐게다.
앎이란 일순간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닐게다.

모름에서 앎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오늘 알게된 것 보다 내일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은 것
그래서 순간 순간 새로운 앎에의 설레임에 잠길 수 있는 것

오늘도 일상적으로 만나게될 당신이지만
오늘 하루만큼 새로이 알아갈 당신을
어제보다 더 설레어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