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 이야기 한 조각

대학 입시 이야기

셈들 2014. 8. 25. 18:16





내가 수능을 보았던 1994년 11월은 정말 너무 추웠다.
지독하게 더웠던 그 해 여름이 지나고 맞이한 겨울이여서였을까?
아니면 내 마음이 먼저 얼어붙어서였을까?

그해 수능날은 하필이면 내 생일 다음 날이었는데
생일을 생일답게 보내지 못한 탓에 기분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당시 나는 의정부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경기도 이북지역의 수험생들은 대부분 의정부에서 시험을 치루었는데
문산에서 중학교 동창 친구가 전날 밤 미리 와서
내 자취방에서 함께 잠을 잤더랬다.

그런데 그날 내 자취방으로 낯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문산의 한 여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내가 한동안 짝사랑의 열병에 빠져있던 소녀의 전화였다.

다만 그 전화는 내가 아닌 내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내 친구와 그 여학생이 교제 중이었음을 그 때 알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밤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수능 첫 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치루는데
학교 수업종 소리와 듣기평가 소리가 함께 나오는 바람에
듣기 평가 지문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요즘 같으면 매스컴에 나와 이슈가 될만한 일이었음에도
사과 한마디도 없었고, 다시 들려주지도 않고 넘어갔고
늘 자신있던 언어영역이었음에도 듣기평가를 전부 다 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시험을 치루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가채점한 결과가 참담했다.
당시는 수능이 200점 만점이던 시절이었는데
수능 직전까지 받던 모의고사 점수에서 2~30점 넘게 떨어져 있었다.

그 해 수능이 유독 평이했고 다른 친구들은 10점 20점씩 점수가 올랐는데
유독 나 혼자만 2~30점 떨어진 결과였다.
비평준화 고등학교였고 그래서 내신이 형편 없던 내게는
청천벽력같은 결과였다.

그 다음날 학교 교실에 모여 가채점한 결과를 이야기하며
웃고 자랑하던 절친한 친구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며 짜증을 부렸다.
책상에 머리 박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노라니
내 자신이 정말 보잘것 없고 실패자 같이만 보일 뿐이었다.

결국 바라던 대학은 커녕 한참 낮추어 지원한 대학마저 
예비합격 상태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부모님 권유와 주변 정보를 통해 2년제인 농협대로 들어갔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그 당시 98%가 4년제에 진학하던 때였고
나는 초라하게 2% 안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2월 졸업식에서 다들 발그레 상기된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내 자신이 어찌나 보잘것 없어 보였던지...

농협대에 입학하고 몇 달 만에 학교를 휴학해 버렸다.
가족들도 선후배도 다 반대하는 반수를 감행하고자 했는데
벌써 여름이었기에 수능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학교를 뛰쳐나와 서울역 근처의 단과학원에서 치룬 
첫 모의고사 성적은 초라함을 넘어 처참했다.
200점 만점에서 100점도 못 넘겼으니까...

그래도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진 못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밤엔 한 숨도 잠을 못 잤다.
이불 덥고 누우면 뜬 눈으로 아침까지 깨어 있다가
낮에 동네 독서실에 엎드려서 자곤 했으니 공부할 새도 없었다.

나름 전략이라고 짠건 짧은 시간 국영수에서 성적 올리긴 어려우니
사회탐구영역을 공략하자고 폼을 잡기는 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한 달 한 달 점수가 조금씩 오르긴 하더니
수능 직전 즈음엔 고3시절 성적으로 얼추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치룬 95년도 수능시험..
그 해 수능은 내 생일 당일날 치루었다.
야밤에 잠을 못이루던 병은 그때까지 계속되었고
정말 어이없게도 사회탐구영역 시험시간에 잠이 들어버려
30분 넘게 시간을 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 가채점 결과는
전년도 수능과 단 1점도 다르지 않은 같은 점수였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구나 싶어서 낙담할 뿐이었다.

형편없는 수능 점수에 충격 받고는
본고사에서라도 승부를 보자 싶어서 본격적으로 본고사 준비를 했는데
어이없게도 본고사는 치루지도 못하고
수능과 내신으로만 전형했던 특차로 대학에 합격해버렸다.

그리고 십여년 세월을 지나오며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면서
그 사이 사이 자그마한 성취들로 소소하게 기뻐할줄 알게 되었다.

수능 실패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상처도 받아봤고
그런 부족하기만한 내 모습에도 감사할 수 많은 조건들이 생겨났다.

기대에 못미치는 수능성적을 받고 인생 다 끝난줄 알았던
열아홉, 스무살의 어리던 내 모습은
단지 마라톤의 출발선에서 남들보다 한 발짝 늦게 출발했을 뿐임을
조금 당겨서 뛴다면 금새 따라잡을 수 있는 것임을
아니 굳이 따라잡아 이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임을
이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감기몸살로 헤롱거리며 하루종일 정신 못차리고 있다가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나 읽어본 뉴스 사이트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직후 자살하는 아이들의 소식을 들으며

고작 출발선에 서 있을 뿐임에도
남들보다 빨리 달리길 강요받는 아이들이
그리고 그 아이들을 품어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한 어른들이
감기몸살보다 더 진한 아픔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