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 이야기 한 조각

군입대 이야기

셈들 2012. 11. 22. 11:34






사실 난 군복무를 집에서 출퇴근하는 공익근무로 마쳤기에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그다지 할 말이 별로 없다.

다만 내 군입대 관련한 이야기에 대한민국 행정의 맹점이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가끔 그에 관련한 이야기를 지인들과 나누곤 한다.


본래 나는 현역입영 대상자였다.

그런데 그 당시 병을 앓고 있던 나는 결국 재검을 신청할 수 밖에 없었다.


본래 내가 앓고 있던 병은 군면제에 해당하는 사유였으나

마침 그 당시가 이회창씨 아들들의 병역비리가 터진 직후였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재검이 참 복잡했더랬다.


우스운건 재검신청을 하고 난 뒤 재검 통지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동네 읍사무소 병무과에서 내 재검통지서를 우리 집으로 들고 찾아온 것은

재검이 있던 날 당일, 그것도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자기네 행정 실수로 재검통지를 미리 못했다며 

우리 집에 찾아와 무릎꿇고 사죄하는 그 공무원을 웃으며 돌려보낼 수 있었던건

다행히 그 당시 PC통신으로 병무청 사이트에 들어가 미리 날짜를 확인하고

통지서도 없이 허겁지겁 재검을 치룰 수는 있었던 덕분이었다.


복잡한 재검이후 결국 면제를 받지 못한채 4급 공익근무요원 대상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럭저럭 이해할만 했다.

재검 결과가 나온게 11월 말이었고 12월 학교 학기가 마친 뒤

군휴학을 신청하고 2월 입대를 기다렸다.

병무청에서 친절하게 미리 전화해줘서 2월 입대 대상자라고 알려준 덕이었다.

2월이 다가오면서 친구들과 인사 나누고 가족 친지들과도 정리를 나누는데

이상하게 입영통지서가 또 날라오지 않는 것이다.

지난 재검 떄의 경험이 있어서 입대일을 며칠 앞두고 병무청에 전화해 봤더니

역시나 병무청 직원의 행정실수로 2월 입대에서 누락되어 6월에 입대하라는 거다.

결국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파송예배까지 드리고 난 직후의 나는

자그만치 4개월을 집에서 두문불출 입대만 기다리며 보내야했다.


우여곡절 끝에 6월이 되어 신병교육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역시나 입소하자마자 입소신검에서 또 내 병이 걸려졌다.

도저히 군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을 입대시켰다고

신교대 군의관이 나를 육군병원으로 검사 보내고

막 병역비리 직후라 몸조심하고 있던 육군병원 의사는

어차피 공익이니 1달 훈련만 받으면 되지 않냐며 그냥 받으라 하고

결국 남들 다 입소해서 제식훈련받고 신병교육을 시작한 이후에도

난 근 1주일을 종일 신교대 의무대와 육군병원만 오가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육군병원 군의관의 승리로 끝난 싸움 덕에

이런 저런 훈련에서 열외받는다는 조건으로 신병교육을 받고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시의 상수도 사업소 야간경비였다.

저녁 6시에 근무를 시작해서 다음날 9시에 퇴근하고

하루 푹 쉰디에 다음 날 저녁 6시에 다시 출근하는

격일 야간근무를 두 달 쯤 하고 있을 때에

또 한번 나를 두고 난리가 났다.


감사를 앞두고 공익근무요원 관련 서류를 조사하다가

내가 본래 배치받아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배치되었음이 밝혀진거다.

"상수원 보호"가 내 임무였는데 공무원들이 그걸 "상수도 사업소"로 잘못 읽고

엉뚱한데 배치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달만에 재배치를 받아야 했고

이미 내 아랫 기수들도 여럿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기에

공익들이지만 나름 군기 잡혀 있던 공익사회에서

서열이 꼬여버리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는 새로 배치된 곳에서 한동안 나를 왕따로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 꼬인 서열 다시 찾고 관계 회복하는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본래 군면제 받았으면 훨씬 더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거라고

조금 얕은 계산도 해본 적 많았지만


강원도 간첩침투 등 한참 힘겨울 때

군복무하며 고생 고생했던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훨씬 편한 조건에 있었기에 또 감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냥 면제받고 학교 복학했으면 가질 수 없었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책들을 읽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아주 조금 조금은 자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쉽고 빠르게 올 수 있었던 길을

왜 그리 멀리 돌아 돌아 와야 했던가 아쉽기도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 시간 하나 하나가

모두 그 분의 섭리라는 말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지금의 나를 만드는 귀한 시간이었음에


그 때의 행정적인 실수들도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