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6학번이다. 물론 원래 95학번이던 적도 있지만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반수 끝에 다시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다시금 새내기로서 1996년을 보냈다. 90년대 중반을 대학에서 보냈기에 흔히들 말하는 X세대였으며 이전 386과 이후 신세대의 중간에 끼어있던 세대였다. 386 선배들처럼 의식화되지도 못했고, 신세대 후배들처럼 자유롭지도 못했다. 그저 적당히 진중하고 또 적당히 가벼웠던 대학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별볼일 없었던, 그저 단조롭고 재미도 없던 날들이었다. 학생운동의 끝물에 서서 투쟁을 목청껏 외쳐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 다하는 그럴듯한 연애 한번 해본적 없는, 아무일 없이 지나친 날들이었다. 1학년 영어회화 수업 때, 옆 사람과 짝을 이루어 자신의 하루 일과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아직 서로 친해질 기회도 없없던 동기 여학생이 내 하루 일과를 듣고 표현한 감상은 그저 단 한 문장일 뿐이었다. "It's too monotonous."
그 시절 또 다른 수업이던 "국문학개론" 시간에 개인의 일상적인 글과 문학작품의 차이를 통해 문학의 정의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글이 독자 대중의 공감을 얻어낼 때 비로소 문학작품으로 거듭단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무렵 내 하루 하루는 철모르고 문학청년 폼을 잡느라 끄적거리던 당시의 유치한 내 글줄 만큼이나 누군가의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지독히도 재미없는 날들일 뿐이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나처럼 1996년을 대학 새내기로 보낸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른채 그저 감정만 앞서던 시절 어설프게 만났다 또 어설프게 해어진 두 사람이 적당히 세상 때가 묻은 서른 다섯 나이로 다시 만난 이야기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서른 다섯 나이에 건축을 매개로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두 사람의 기억찾기에 관한 영화이다.
사실 '기억 찾기'를 소재로한 서사는 흔하게 많은 편이다. 한류 드라마의 시초였던 윤석호 감독의 계절 4부작은 네 작품 모두가 '기억'이라는 매개를 관통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있다. 얼마전에 언급했던 <오버 더 레인보우> 역시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90년대의 대학시절 추억들을 되짚어 나가는 이야기였으며, <냉정과 열정사이>는 이 '기억'이라는 소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고미술품 복원사로 설정하여 10년전에 지나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 복원해 내어 현재의 시간 속에 다시 이어놓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학개론>은 일면 <냉정과 열정사이>를 닮은듯 했다.
그러나 고미술품 복원사는 지나간 과거의 것을 되살려 오늘의 것으로 이어 놓는 일인 반면 건축가는 그저 예전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어갈 뿐이다. 그것이 극 중 담긴 이야기처럼 재건축은 너무 낯설어서 이전 집의 증축으로 한정했다 할지라도 결국엔 담장을 허물고 이층에 방을 만들어, 과거의 토대 위에 전혀 새로운 집을 지어가는 것이다. 이전의 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더이상 이전 집이 아닌 새로운 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던 스무살엔 반지하에 살면서도 마당이 있는 2층집을 꿈꾸었지만, 서른다섯의 나이에 집은 좋고 싫고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저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공간일 뿐이다.
<건축학개론>은 그래서 <냉정과 열정사이>와 전혀 다른 결론을 택한듯 하다. 과거의 사랑을 그 마음 그대로 되살려 10년후의 오늘에 되살려 놓은 것이 <냉정과 열정사이>였다면 건축학개론은 15년 전의 첫사랑은 그저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으로 장식한 채, 그 위에 15년이 지난 오늘의 새로운 집을 지어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15년전의 96학번 새내기가 아니라 서른다섯의 남자와 여자일 뿐이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사실 내가 기대하던 바는 90년대 대학문화에 대한 향수였다. 간간이 뒷배경으로 조그맣게 들리던 당시 유행하던 노래자락들이나 삐삐, CD같은 소품들, 그리고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란 노래 같은 기제들로 이런 향수를 자극해보려 한듯 보이지만 정확히 바로 그 때를 살았던 나로선 그다지 와 닿지 못했다. 물론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들도 잘 모르고 삐삐나 CD같은 신문물에도 지극히 뒤쳐졌던, 그래서 남들 다 씨티폰이나 휴대폰 들고 다닐 무렵에야 뒤늦게 삐삐대열에 동참했던, 늘 남들보다 몇 걸음 늦었던 나였기에 더욱 그런듯 싶기도 하다. 사실 영화에서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만드는 기제는 그런 물건들이 아니라 한가인이나 배수지라는 여배우의 '지나치게' 예쁜 얼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시절 첫사랑을 경험한 이들이 모두 배수지 같은 예쁜 여학생과 섬씽을 만들진 않았겠지만, 과거는 아름답게 포장하기에 더욱 추억할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늘 단조롭고 지루했던, 그래서 영원히 반복될 것 같았던 1996년의 날들은 어느새 16년이란 시간 속에 저 만치 멀어져버렸다. 삐삐도 휴대폰도 늘 남들보다 몇 걸음 늦었고 요즈음도 남들 다 들고 다닌다는 스마트폰 하나 없이 피처폰을 들고다니는 나이기에 늘 남들보다 몇 걸음 뒤쳐져 걷고 있다 싶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남들은 16년만큼 멀리 가 버렸는데, 나 혼자 제자리걸음으로 아직도 1996년을 살고 있는건 아닌가 싶어진다. 지식도 마음도 이십대의 날들에서 눈꼽만큼도 자라지 못한 나의 삼십대도 여전히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기엔 한참 모자란듯 싶다. 그래서 공감을 얻지 못해 그저 개인의 일상적 글로 머물러 있는 글처럼, 여전히 멋진 집을 꿈꾸기만 하는 내 덜 자란 삼십대의 날들에 소소한 위로라도 던져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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